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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탈주 - 1

2012/05/13 17:07 | Posted by 샤니체리






















【전야】



「작전이 정해졌어」


심야 두시, 평소처럼 둥근테이블. 리리스는 결심을 재확인하려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은 요 이틀밤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의제는, 탈주계획.


「정말로……내일, 하는 거에요?」


예의『처형』이 바로 어제 오후의 일, 그리고 탈주를 결심한 것이 어젯밤. 그런데 탈주가내일이란 이야기는 너무나도 서두르는 것 같았다.

리리스가 말했다.


「우물쭈물할 틈이 없어. ……왜냐면『다음』이 언제일지 어떻게 알아?」

「그건 그런지만……」


내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그 차는 지금까지도 자주 왓었을까요?」

「몰라」리리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걸 본건 어제가 처음이었고. ……볼포크도 마찬가지지?」

리라스가 바라보자, 볼포크는 가만히 끄덕인다.

나는 계속 질문한다.


「어째서 로봇을 수리 안 하는 걸까요? 아무리 그래도 고철로 만들다니……」

「비용, 비용 때문이야. 수리비를 낼 바에야 고물상에서 다시 사들이는 편이 싸게 먹히니까」


리리스가 명료하게 대답한다. 나는 「……그런 건가요」라고 힘없이 대답한다.

「어쨌든」리리스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우물쭈물할 틈이 없어」

그 순간, 리리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동시에 볼포크도 살며시 나를 곁눈질했다.

――아, 그런가.

이 순간 나는 리리스의 의사를 깨달았다. 그녀가 탈주를 서두르는 진짜 이유를.

그것은 나와 볼포크를 위해서다.

고철을 짜 맞추어 만든 나와, 굼뜬 볼포크. 혹시 이번에 또 『처형』이 이루어 진다면, 가장 위험한 건 틀림없이 우리 두 사람이다. 리리스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작전말인데」


리리스는 이야기를 되돌렸다.


「어제도 이야기했다시피, 탈주에는『활로』와 『타이밍』, 이 두가지 조건이 필요해. ……먼저, 탈출 경로」


리리스는 테이블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꺼내들었다. 휜 금속판과 잘려나간 볼트 따위를 어지러이 놓는다.


「여기가 현장이야. 그리고 여기가 『위』고 이쪽이 『장』」


리리스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테이블 위 공사현장의 간단한 요약도가 만들어진다.


「주변 철조망은 고압전류가 흐르니까 무리. 그렇다면 탈출 경로는 둘. 『위』를 돌파해서 해안선으로 도망치던가, 아니면 『장』을 돌파해서 내륙으로 도망치던가. 모두 알고 있겠지만, 위 쪽은 위험아 너무 커. 해안선은 엄폐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금방 열선총을 맞고 말거야」


리리스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으로 피스톨을 만들어 댄다.


「그러니 도망친다면 『장』쪽이야. 이동수단은 반출용 트럭을 훔쳐 타고. 여기부터 도심지까지 도망친다면 다른 일반 차량에 섞일 수 있어」

「저어, 잠깐만요. 빼앗은 트럭은 누가 운전하는 거죠?」

「뻔하잖아. 나야」

「에? 할 수 있나요?」

「난 두 번째 전의 현장에선 운전수였어. 굴삭기 같은 중형차에 탄 경험도 있다고」

「리리스, 무면허」

「볼포크는 좀 가만히 있어」


대화 도중에 끼어든 볼포크를 찰싹 내려치고 리리스는 설명을 계속한다.


「게획은 이래……」


리리스는 탈주 계획 수단을 차례대로 설명한다. 우리는 그 아이디어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평범한 로봇이라면 상상도 못할, 인간을 비웃을 정도로 대담한 작전이었다.

다만, 나는 리리스의 계획이 한가지 마음에 걸렸다.


「모두 함께 도망가……지는 못하는 건가요?」

「뭐?」리리스가 놀란듯 눈을 깜박거린다.


「그러니, 이왕 탈주한다면 모두 함께――」

「그건 안 돼」


리리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죠?」

「여긴 로봇이 80대나 넘게 있다고? 아무리 그래도 수가 너무 많아. 게다가 애초에 모두가 우리들 하는 말을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리리스가 냉혹하게 단언한다.

그녀의 경험상, 탈주는 소수만 비밀리에 진행하는 편이 성공하기 쉽기에, 다수로 잘 굴러간 사례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로봇들을 버리는 일이 너무 안타까웠다. 세달 가까이 줄곧 같은 현장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조금 정이 든 건지도 모르겠거니와, 무엇보다도 그 처참한 처형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다음 나는 박사님을 떠올렸다. 언제나 쓰러진 로봇을 발견하면 도와주었던 박사님이 모습을. 그래, 박사님이라면 분명――.

그래서 나는 제안했다.


「리리스, 그렇다면 말이에요」

「뭔데?」

「적어도 이렇게 안 해볼레요?」


나는 하나의 제안――『절충안』을 꺼냈다. 그녀는 그 이야길 듣자마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으음……」하고 신음했다.

내가 이야기 한 것은, 장난스럽고도 무모한 계획.



【당일】



그 『처형』으로부터 불과 이틀 후, 내가 이현장에 온지 팔십오일째.

심야.

오늘 마지막 폐품 반출 트럭이 현장에 드러난――그 순간.


「로봇 여러분!」


리리스가 외쳤다. 그 손에는 소형 마이크가 들렸다.


「잘 들으세요!」


그 목소리는 현장에 널리 울려 퍼졌다. 왜냐면 다른 몇 몇 로봇 등에, 우리들이 몰래 소형 스피커를 달아 두었으니까 (물론 이것도 폐품으로 얻은 『전리품』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장치가 더 있다.


「지금부터――전원――여길――나간다――!」


리리스는 명령했다――녹음 테이프에 넣어둔 『현장감독』의 목소리를 재생해서.

그런다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내가 매일 들었던, 바로 그 대사가 울려퍼졌다.


「이건 명령이다――!」


결과는 즉각 나타났다.

현장 감독의 목소리로 명령을 받은 로봇들은, 일제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질퍽한 땅을 달려서, 몇몇은 위로, 몇몇은 장으로.

이런 갑작스런 소동에 감시원은 패닉에 빠졌다.


「뭘 하는거냐, 멈춰! 전원 멈춰라! 이건 명령이다!」


그러자 도망치던 로봇들이 마치 어떤 놀이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산했던 바.


「지금부터――전원――여기를――나간다――! 이건 명령이다――!」


테이프는 다시 반복한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명령을 받은 로봇들은 속박에 풀려난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도망쳤다. 도다시 현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리리스의 처음 계획은, 다른 로봇들을 『미끼』로 쓸 예정이었다. 여차할 때를 대비해 녹음․편집한 현장감독의 명령 테이블을 방송해서, 혼란한 틈을 타서 우리들 셋만 탈주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계획에 다른 아이디어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모두들 안전 회로를 해제히 두면 곧바로 같이 탈주할 수 있잖아요?」라고.

해제작업은 맥이 풀릴 정도로 간단했다. 그 어떤 로봇의 안전회로도 양산형에 싸구려라서 억지로 뜯어내면 금방 해제 가능했다. 그러니 우리들은 어젯밤 분량을 나누어 약 팔십대 로봇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해제해 주었다. 리리스는 「이런 짓을 한들……」라면서 궁시렁댔지만, 결국 도와주었다.

그렇게 되어 이 『로봇 대탈주』를 실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긴급 정지다! 긴급 정지!」


위잉 경보음이 울려 퍼진다. 현장감독이 허리에 차 둔 긴급정지버튼을 정신없이 누르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지만 안전회로가 없는 로봇들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다.

여기까진 계획대로.

한편, 혼잡하고 떠들썩한 가운데, 단 하나 볼포크만이 폐품을 든 체 멈췄다. 조금 무릎이 꺾인 자세로,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의 안전회로는 리리스가 못 풀었기에 긴급 정지 버튼의 효과를 받고 만 것이다.


「어이――오십번을――여기에――날라라!」


리리스가 테이프를 재생하여 가까이 있던 로봇에게 명령한다. 원래대로라면 안전회로가 해제된 로봇들이 명령을 들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스며들고 익숙해진 공포에 그들은 실로 간단히 볼포크의 주변에 모였다.

경직된 볼포크를 로봇들이 넷 달라붙어 나른다. 볼포크가 아무리 거대한 몸집이라곤 해도, 폐품을 지긋지긋하게 나른 로봇들에게 있어선 손쉬운 일이라, 순식간에 거구는 트럭 화물칸에 실렸다.

「히익!」하고 트럭 운전수가 눈길도 주지 않고 도망친다. 리리스는 남은 자동차 키를 돌려 시동을 건다. 탈주 계획의 중요 요소인 차량을 훔치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지금부터――전원――여길――나간다――! 이건 명령이다――!」


리리스가 다시금 녹음 테이프를 흘려보내자, 볼포크를 나르던 로봇들은 장난치다 들킨 꼬마처럼 일제히 흩어졌다. 그중에는「안녕이다!」「잘지내!」라고 손을 흔들기도 했다.


「아, 안녕히가세요! 부디 무사히……!」


나도 있는 힘껏 팔을 흔들어 이별을 알린다. 이젠 두 번다시 그들을 만날 수 없겠지――그런 예감이 가슴에 벅차올랐으니까.

계속 울려 퍼지는 사이렌. 폭주하는 로봇, 감시원의 호통, 울려퍼지는 가짜 현장 감독의 명령――한밤중의 공사 현장은 지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아이리스! 가자!」


운전석에서 리리스가 소리친다. 트럭 엔진 소리가 말의 투레질처럼 나를 다그친다.


「아, 잠, 잠깐 기다려요!」


나는 허둥지둥 트럭으로 캐터필러를 움직인다.


「자, 잡아!」


리리스그 손을 내민다. 하반신이 캐터필러이기에 자동차까진 쉬이 다가간 나를 리리스가 꾹 조수석까지 들어 올린다. 이런 때에 그녀의 완력이 참으로 실감 난다.


「출발한다!」


마치 지금부터 드라이브라도 나가는 것처럼, 리리스가 흥겹게 소리쳤다.

엑셀을 밟고 엔진이 우르릉 거리더니, 탈주차는 세 탈옥범을 태우고 한밤중 길을 달려나갔다.



【battery=04:50:36】



트럭이 스피드를 마구 올린다. 『장』구역에 설치된 벨트 컨베이어를 스치고, 굴러다니는 폐품을 튕겨내며 질주한다.

마지막 관문은 현장 출구인 수위실이다.


「거기 트럭 멈춰!」


수위실 스피커가 정지 명령을 내린다. 출구는 차단기로 가로막힌데다 원추형 라비콘이 가로로 나란히 우리들의 길을 막고 있다.


「방해하면 납작해진다!」


리리스는 과격한 말을 내뱉으며 멈출줄 모르고 트럭의 스피드를 올린다.


「부, 부딪혀요!」


내가 외친 순간엔 이미 부딪혀 있었다. 라비콘이 몇 개 튕겨나가고 차단기를 부수고, 트럭은 순식간에 제1관문을 돌파했다.

「흥, 간단하지!」라고 리리스가 말했다. 핸들을 쥔 그녀의 눈은 찬란하게 빛났고 입가에는 인격이 바뀐 것처럼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으,으아아아……」라며 필사적으로 안전벨트를 찼다. 차체가 흔들흔들 위아래로 격하게 흔들리는지라 이미 천장에 머리를 세 번이나 부딪혔다.

트럭은 마부를 잃고 날뛰는 말처럼 자갈길을 맹렬히 달려나갔다, 조금 후엔 일반 도로로 나왔다.


「리리스!」

「왜!」

「모두들 잘 도망 쳤을까요!」

「글쎄! 하지만 할 만큼 했잖아! 남은 건 자기 책임이야! ……그런데 아이리스!」

「왜요?」

「자동차는 하늘 날 수 있을까?」

「……네?」

「제2관문이야!」


리리스가 바라보는 방향에 『통행금지』라는 간판이 있었고, 아스팔트가 깊이 파인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이대로 돌진했다간 틀림없이 전복하고 만다.

「브, 브레이크!」나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다.

「멈추면 지는거야!」리리스는 더더욱 스피드를 올린다.


「자, 잠깐, 리리스!?」


내가 외친 순간, 통행금지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쿵쾅 날아가며 트럭은 도로에 쌓아 올려둔 흙더미를 점프대 삼아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그리고 쿵쾅거리며 착지했다.


「클리어―!」


훌륭하게 구멍을 뛰어넘은 리리스가 기쁘다는 듯 외쳤다. 이미, 운전이 난폭하다는 레벨이 아니다.


「아이리스, 라디오 켜!」

「난 그런기능 없어요!」

「아니야, 자동차 라디오 말이야! 거기 튀어나온 스윗치를 눌러!」

「이, 이거 말인가요?」

「그건 비상등이야! 아래쪽, 그래, 그거!」


나는 허둥지둥 라디오 스윗치를 누른다. 지, 지직 하는 소음이 차안에 울려 퍼진다.


「주파수 맞춰!」

「잠깐 기다려주세요!」


거세게 흔들리는 차안에서 나는 착칼거리며 방송국을 고른다. 하지만 노래나 음악만 나오지 교통 정보는 안 나온다.


「교통 정보는 안 나와요!」

「그게 아냐! 음악이야, 음악!」

「네? 음악? 왜요?」


내가 이상하다는 듯 물어보자, 리리스는 기운차게 소리친다.


「기운 내려고 그러는 거잖아!!」


몇 초 후, 차안에는 신나는 록풍 음악이 흘러나왔다. 리리스의 소망대로 큰소리로.


「저, 저어!」나는 귀를 막으며 소리친다.

「왜그래 아이리스!?」리리스도 큰소리로 대답한다.


「괜찮아요!? 이렇게 거친 음악인데!」

「괜찮아! 이런 건! 뭐나 해도 기세가 중요해! ……자, 제 3관문!」


눈 앞에 자동차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무래도 신호를 기다리는 모양이다――라고 여유롭게 생각할 틈도 없이, 리리스는 또 액셀을 밟고 풀 스피드로 자동차를 향해 돌진한다. 라디오에서는 록 가수가 절규한다. 이미 뭐가 뭔지 모르겠다.


「비켜비켜비켜어어어!!」


리리스는 핸들을 뱅글 돌리며 도로 오른쪽으로 트럭을 접근시켰다. 자동차와 가드레일 사이를 지나갈 셈이다――아니 트럭이 지나갈 틈은 도저히 없다.


「이 리리스님이 비키라잖아!!」


리리스는 경적을 연신 누른다. 앞의 차 운전수가 무슨 일인가 돌아보더니, 그 표정이 공포에 일그러지고 자동차들이 나 몰라라 도망친다.

그리고 리리스는 트럭 오른쪽을 가드레일에 딱 붙이고, 왼쪽으로는 앞서 가든 차량의 사이드미러를 날리면서 신호를 기다리던 다섯 대를 단숨에 돌파했다.


「잠깐, 리리스, 교차로!」


신호 다음엔 아니나 다를까, 차가 지나가는 교차로.

하지만 리리스의 사전에 브레이크란 문자는 없다. 그녀는 경적을 마치 장난감처럼 신나게 누르며 스피드를 올린다. 록 가수가 「GO! GO! GO!」라고 절규하며 한창 최고조에 달했다.

교차로에서 돌연히 나타난 폭주 트럭에 놀란 다른 차량이 급브레이크, 끼기긱 하는 마찰소리가 겹쳐지더니, 그 직후 우리들의 트럭이 탄환처럼 교차로를 빠져나간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났지만, 이미 확인할 기운도 전혀 안 난다.

나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지만, 록 가수는 낮은 목소리로 신나게 발라드를 부르기 시작했고, 리리스도 그에 맞추어 기분 좋다는 듯 흥얼거린다.


「저 리리스, 슬슬 스피드 떨어뜨리는게……」

「이제 오셨다고!」

「네?」

「뒤야! 제4관문!」


나는 창문으로 뒤를 바라본다. 경찰 비상등을 킨 차량이 셋., 우리들을 쫓아왔다.

――경찰!



【battery=04:46:03】



「거기 트럭! 지금 멈춰!」경찰 차량이 당연한 명령을 했다.

「차량을 왼쪽에 세워!」

「저, 저기 경찰이!」나는 깜짝 놀라 소리친다.

「경찰이!?」화난 표정으로 다시 물어보는 리리스.

「멈추라는데요!」

「그래서!?」

「에, 저……어쩌죠?」

「짭새 같은 건 따돌릴거야!」


리리스는 액셀을 더더욱 밟았다.

엔진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제한 속도를 단숨에 몇 배는 넘어설 듯 한 스피드로 커브로 돌진한다. 원심력으로 나는 왼쪽 문에 부딪힌다.


「어때!? 거리는!」

「꽤, 꽤 많이 떨어졌어요! 하지만 아직 쫓아와요……앗!」

「왜 그래 아이리스!」

「뭐, 뭔가 나왔어요!」

「알아 듣도록 설명해!」

「작은게 나왔어요!」


리리스가 「그래서 그게 뭔데!?」라며 창문에서 고개를 내민다. 긴 머리카락이 생물처럼 바람에 나부낀다.


「으악, 『교기(交機)』잖아!」


뒤로 로봇들이 쫒아왔다.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었지만, 하반신은 네 개의 바퀴――즉 로봇카다. 머리 위 경찰 비상등은 경찰차량이라는 증거이다.


「교기?」

「교통기동경찰로봇이야! 속도위반 차량을 잡는 경찰의 하수인!」

「저, 점점 다가와요!」

「알아!」


리리스는 더더욱 액셀을 밟는다. 하지만 교기 로봇이 훨씬 빠르다. 차이가 점점 좁혀진다.


「거기 차량, 정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강제집행에 들어갑니다. 거기 차량……」


뒤에서 전자음이 경고한다.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압박감이 느껴진다.


「리리스, 무, 무슨 무기같은 걸 들고 있어요!」

「무기라니 뭔데!」

「권총이에요!」

「칫, 타이어를 쏘아 펑크시킬 셈이네……아이리스!」

「뭔가요!」

「영격해버려!」

「네에!?」

「밑에 공구함이 있잖아!」


그러고 보니 조수석 아래엔 공구함이 있었다. 리리스가 내 머리를 열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걸 도로에 쏟아! 」

「에? 어째서요?」

「됐으니까 빨리!」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교기 로봇이 위협사격을 시작하자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에잇!」


시킨 대로 공구함 볼트를 한웅큼 쥐고,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밤 도로에 쩔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볼트가 흩어진다.

그러자마자 한 대의 교기 로봇이 볼트를 밟고 미끌어졌다.


「더, 더! 있는 것 전부 먹여줘!」

「아, 알겠습니다!」


나는 공구함을 통째로 뒤집어 내용물을 단숨에 뿌린다. 기분 좋을 정도로 신나게 불법튀기한 볼트, 넛트, 못, 나사, 톱날 따위가 굴러간다.

이건 효과가 있었다. 교기 로봇은 차례대로 부품을 밟고 미끌어지고, 전복되거나 코스에서 벗어나갔다.


「이건……기름?」


잘 살펴보니 공구함 안은 기름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교기 로봇이 그렇게나 간단히 미끌어진 것은 이것이 원인인 모양이다.


「어때? 유비무환이야」리리스가 멋지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았어, 이대로 옆 마을가지 달려간다--」


그 순간이었다.


「리리스, 앞에!」


내가 소리치자, 「거짓말……!」리리스의 안색이 순식간이 바뀌었다.

도로 앞쪽에는 무수히 많은 경찰 비상등이 빛나고 있었고, 이 트럭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대형 장갑차가 여럿 벽을 만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


「큰일이다!」


리리스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늦었다.

장갑차 위에서 빛의 화살이 쏘아지고, 앞 유리창은 새파란 섬광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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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도 서너부분으로 나뉘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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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코르느는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마차 유리창을 조금 연 리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한숨을 쉰다. 좁은 마차 안에서 세 사람이 몸을 부대끼며 하룻밤을 보낸 여독도, 코르느 거리에 압도되어 멀리 날아가 버렸다.

리사가 들여다보는 창문 틈으로 조금이나마 아마포라에게 보이는 풍경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번화가 길이 석재로 포장된 것은 아네로와 마찬가지였지만, 도로 변 상점조차도 전부 석조 건물이다. 시청 같은 공공건물이 높이 치솟아 있으며, 가는 곳마다 미려한 조각으로 가득하다. 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학습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이라고 한다.

지금 막 지나간 공공 우물가만 해도 몇 미인이 춤추는 모습을 본뜬 조각이 둘러싸고 있다. 한숨이 절로 나올 법한 훌륭한 작품인데, 그곳에서 물을 깃는 사람들은 그런 예술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나무통이나 물독을 안고 담소하기 여념이 없다. 마치 그것들이 대단한 광경은 아니라는 것처럼.

리사의 태도에 흥미가 돈 것인지, 엘렌도 창문을 올려다본다. 그 동작을 깨달은 리사가 창가에서 자리로 돌아앉고서, 자리에 일어서서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엘렌을 뒤에서 살며시 들어주었다. 하룻밤 만에 엘렌은 리사에게 부쩍 낯이 익었다.


「여긴 처음이니?」


아마포라가 리사에게 물었다. 흔들림에 엘렌이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받치며 리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뻣뻣하게 끄덕인다.


「아……미안, 이런 상황인데 들떠서 그만……」

「아니, 괜찮아. 참 아름다운 도시네」


예술과 학교의 도시. 테오발트는 어머니를 잃기 이전엔 대륙의 대학에 가고 싶어했었다고 했다. 분명 이 도시도 그 후보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을까. 함께 올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부질없는 생각만 자꾸 든다.


「농촌에서 살다보면 우리 장원에서 떨어질 일이 거의 없으니깐……. 기껏해야 걸어서 갈 수 있는 아네로 거리가 다지. 너는 아니야?」


이번엔 리사가 아마포라에게 묻는다. 아마포라는 쓴웃음으로 답했다.


「그렇네. 마찬가지야」


엘렌이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창문 사이로 보이는 경치만 보아도, 진기한 것투성이다. 하지만 아마포라는 딱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리사가 보기엔 몹시 침착한 것처럼 보이는지는 모르지만, 단순히 일일이 놀랄 여유가 없는 것 뿐이다.

마음으로 싸우기로 정했다. 설사 자유를 잃는다 해도, 테오발트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다. 그걸 위해서 최대한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으니까, 지금은 억지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만 했다.

코르느는 수로가 많은 도시다. 화물을 적재한 배는 도로를 오가는 마차처럼 왕복하고,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귀족 여성들이 뱃놀이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수로에 걸린 다리를 몇 개 지나자 엘렌도 이제는 지쳤는지,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기가 지친 건지도 모르겠다.


「엘렌, 지쳤어?」

「괜찮아」


아마포라의 물음에 엘렌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엘렌은 참을성이 많으니까. 좁은 곳에 세 사람이 들어간 탓이 피로를 느끼지 않을 리가 없을 텐데, 아마포라는 리사와 얼굴을 마주하고 쓴 웃음지었다. 작은 엘렌이 괜찮다고 하니, 두 사람이 지쳤다곤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걸릴까. 한참 전부터 비탈길을 오른지라 차체가 기울어져 있어 버티고 있던 다리가 저려온다.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말편자가 바위를 밟는 경쾌한 소리가 사라지고, 마차의 요동이 멎었다.

아마포라는 리사와 다시 얼굴을 마주본다. 하지만, 이번엔 긴장한 표정이다.


「도착한걸까」


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보려다――온 몸이 굳어버렸다. 창문 반대편에 있는 마차의 문이 난폭하게 열여 재껴졌던 것이다. 리사가 놀라서 물러나고, 엘렌은 아마포라에게 안긴다.


「때가 됐다, 《칸타토리스》」


가에타노가 냉담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내리라고 턱짓으로 명령하자 그리고 나서야 아마포라 일행은 좁은 상자에서 해방되었다. 옷가지는 리사가 안아 들고, 아마포라는 엘렌의 손을 잡고서 돌바닥 위에 내렸다.

그곳은 두 탑 사이에 낀 성문 앞이었다. 방문객을 쉬이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 쇠격자 문이 사슬에 메어 올라가있다.

두 탑 옆에는 높은 성벽이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활을 든 보초병이 일정 간격으로 나란히 서 있다.

세 사람이 내리자 두 마차는 떠나갔다. 편도비 밖에 지불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포라를 돌려보내는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화물을 안은 리사는 압도된 듯 성벽을 올려다본다. 엘렌은 가에타노로부터 도망치듯 아마포라 뒤로 숨었다.

가에타노는 얌전히 따르는 아마포라가 만족스러운지 연신 웃었지만, 가슴에 걸린 돌을 보자마자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 싸구려는 버리든지 숨기든지 해. 모처럼 비싼 옷을 망치잖아」


그렇게 말하며 《수면에 비치는 달》을 빼앗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아마포라는 허둥지둥 두 손으로 돌을 품에 안았다. 거역하는 태도에 가에타노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서로 노려본 건 한 순간. 아마포라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버릴수는 없다.

데보라가 만들어준 삼베끈으로 동여맨 돌. 아마포라는 주저앉아 뒤에 숨은 엘렌의 목에 그것을 건다.


「맡아 줄레? 무척 소중한 거야. ……알지?」


애초엔 테오발트가 어머니에게서 받은 검의 장식이었던 돌이다. 하얗고 반투명하며, 이리저리 굴려보면 파란 빛이 하늘하늘 스며나온다. 그 용모가 호수에 비춰진 달빛 같았기에, 아마포라는 옛 노래에 빗대어 《수면에 비치는 달》이라고 이름 지었다.

아마포라가 걸었을 땐 가슴깨에 있었던 돌도 엘렌이 거니 배까지 온다. 이 물건은 테오발트에게서 아마포라에게로 전해진 것이라는 걸 엘렌도 안다. 금발을 흔들며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렌은 작은 손으로 꼭 쥐었다.


「흥, 뭐 얘한테나 잘 어울릴 물건이군. 다음번엔 내가 더 좋은 걸주지」


업신여기는 말투가 위로 들려온다. 아마포라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지만, 엘렌은 떨면서도 매서운 눈으로 가에타노를 마주 쏘아보았다.


「그 눈빛은 뭐냐」


가에타노의 불쾌하다는 목소리에 아마포라는 허둥지둥 엘렌을 안는다. 이젠 두 번 다시 엘렌을 그런 지경에 빠지게 둘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리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 저어 누가 오셨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빈손을 힘껏 흔든다. 그 모습을 보고서 병사가 다가왔던 것이다. 가에타노가 노려보자 리사는 깜짝 놀라 손을 내리고서 두, 세걸음 물러난다.


「거기서 뭘 하는거지?」


성벽 위의 보초병과 마찬가지로 갑옷을 입은 젊은 문지기다. 문지기는 주저앉은 아마포라를 보고서 수상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이 아가씨는 무슨 일이지. 기분이 안 좋으신가?」


문지기가 리사에게 질문했다. 리사가 손을 흔들어 그를 부른 건 아마포라가 위험해 졌기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그랬을 것이다. 리사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금방 가에타노가 가로막았다.


「천만에요. 괜찮아요. 조금 긴장한 모양이라서요」

「긴장?」

「그녀는 《칸타토리스》지원자에요」


가에타노의 말을 듣고 문지기는 납득한 듯 끄덕였다. 가슴에 주먹을 대고 이사한 뒤, 미소지었다.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라트레이아를 위해서 노래하실 분이 늘어난다면 전하도 기뻐하시겠지요. ――잠시 기다려주시길」


그렇게 말하며 문지기는 문 왼쪽에 있는 탑에 들어갔다. 경비실일 것이다. 조금 뒤 안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육십대 중반,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머리를 틀어 올렸다. 그 탓인지 얼굴 피부가 조금 당겨져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주름을 펴기 위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등을 곧게 펴고 다가온 여자는 아마포라와 리사를 쭉 째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원자는 어느분?」


나이가 느껴지는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신기하게도 잘 들리는 목소리.

노래 연습을 한 사람의 목소리라는 걸 아마포라는 금방 깨달았다. 과거, 자신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교사도 그런 분위기였으니까.


「이 아가씨입니다」


가에타노가 시선으로 아마포라를 가리킨다. 아마포라는 일어서서 엘렌을 리사에게 맡긴 다음, 옷단을 잡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좋아요. 그럼 목소리를 조금 시험해보겠어요. 나를 따라서――」

「잠깐만요. 여기서 시험하는 겁니까? 전하 안전이 아니라 당신이?」


그녀의 말을 당돌하게 막고 가에타노가 물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푸른눈동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체도 모를 여자가 합격 여부를 결정하다니 참을 수 없다는 것일까.

하지만 여자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서, 정중한 말투로 알린다.


「지원자는 하루에 두 세 사람 나타납니다. 그들 모두를 전하 앞으로 데려올 순 없기에. 저 처럼 《칸타토리스》를 은퇴한 사람이 이렇게 어느 정도 기량을 가진 지원자만 통과시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거침없이 자신을 《칸타토리스》였다고 전한 것은 가에타노를 납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가에타노는 마지못해 물러난다.


「실례했습니다. 계속 해 주시길」

「납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원자 분. 저를 따라서 노래하세요」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고서 가에타노를 물러나게 만든 전《칸타토리스》여성은 아마포라에게 느닷없이 고개를 돌려 소리를 냈다. 그저『아』만 계속 내었을 뿐이지만, 저음과 고음을 거침없이 느긋하게 왕복하는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주 짧은 노래를 끝마친 여자는 심호흡 한 다음, 아마포라를 재촉했다.


「자, 지금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보세요」


고개를 끄덕이고 아마포라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엘렌과 손을 잡고 있던 리사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빛을 보내온다. 일부러 불합격 당하면 될텐데, 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포라도 마찬가지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에타노는 아마포라의 노래를 안다. 일부러 소리를 삐끗했다간 금방 알아챌 것이다. 실제로 곁에 서 있는 가에타노는 연신 웃으면서도 곁눈으로는 아마포라의 동작을 눈여겨보고 있다.

지금은 그의 바람대로 하자. 그렇게 결김하고 아마포라는 목소리를 내었다.

마찬가지로 노래할 샘이었다. 하지만, 무표정으로 아마포라를 마주하던 전 《칸타토리스》여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눈을 크게 뜨고 작게 몸을 뒤로 젖힌다. 시야 끝에 있는 리사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거렸다. 태연한 건 엘렌 뿐이었고 가에타노는 결과가 궁금한지 안절부절 침착하게 있질 못한다.


「저……잘못됐나요?」


작은 기대를 담아 물어보았다. 제대로 노래해서 불합격이라면 가에타노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아마포라에게는 가장 유리한 결과다. 《칸타토리스》가 될 수 없다면 그는 아마포라를 버릴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걸어서라도 테네렛사 가에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은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럴리가요. ……따라오세요. 전하께 들려드리죠」


여성은 바로 발길을 돌려 성문으로 다가갔다. 즉, 합격이란 뜻이다.

아마포라는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노래를 인정받았으니 기뻐해야 할 텐데.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다.


「자, 가자」


가에타노는 의기양양하게 아마포라를 재촉하고 걸어간다. 한숨을 한 번 더 쉬고 아마포라는 뒤를 따라갔다. 리사도 엘렌의 손을 잡고 따라온다.

성문은 문지기가 둘 서 있었고, 한사람은 좀 전의 젊은 청년이었다. 문을 지나가는 도중, 기쁘게 웃으며 축하드립니다, 라고 환영해 주었다. 진심으로 축복해 주는데도 기뻐할 수 가 없어서 미안한 나머지 아마포라는 애매한 미소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에 따라 성안에 들어서자 넓은 안뜰이 나왔다. 좌측 대각선 앞에는 반원형 탑이 있고, 성문에 붙은 성벽 일부와 일체화된 성벽이 탑에 붙어 지탱하고 있다. 그 탑 정면에 있는 건물은 거주구역으로 보였다.

거리 모습에 비하면 차분한 인상이다. 예술 도시의 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밋밋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은 전시에 전투의 중심이 된다.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도 방심하지 않고 성 안의 성가신 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겠다는 결의가 드러나 보였다.

전《칸타토리스》여성은 멈추지 않고 나아가, 탑과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나타나는 문으로 향한다. 성 내부는 벽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물론 그 벽 상부는 화살을 쏠 수 있는 틈이 난 통로로 되어 있고 보초병이 서 있다.

아마포라는 가에타노와 나란히 걸었다. 조금 떨어져서 리사와 엘렌도 따라온다.

전후 거리는 충분하다. 그걸 확인하고서 아마포라는 작은 목소리로 가에타노에게 말을 건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가에타노는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관문을 하나 통과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딱히 화내지도 않고 작은 목소리로 되물어온다.


「뭐지? 유익한 질문이라면 대답해주지」


넘어오기 시작했다. 살며시 주먹을 쥐고, 하지만 감정이 안 드러나게끔 앞만 바라보며 평온한 말투로 묻는다.


「제가 《칸타토리스》가 된다고 해도, 혹시 앞으로 제 목소리가 어떤 이유로 망가진다면 어쩔 샘이시죠」


한층 들뜬 가에타노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눈초리를 치켜뜨고 속삭이듯 엄하게 위압한다.


「묘한 생각을 다 하는군. 꼬맹이를 수로에 처박아 버려도 되나?」

「넘겨짚지 마세요. 저는 도망도 안치거니와 자해도 안 합니다. 하지만 병으로 목소리를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떨거죠? 역시 이혼입니까?」

「……저 사환한테 들었나. ――뭐 그렇게 되겠지. 쓸모없는 여자는 필요없어. 또 다른 부인을 찾을 거다」


전처를 죽게 만들었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구역질이 났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마음으로 패배했다간 끝장이다.


「그럼,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만……제가 하얀 결혼을 증명하지 못할 몸이라면 어쩔 셈이죠?」


상스런 말을 꺼냈다는 건 스스로도 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다. 그가 지금 어떻게 나올지를.

가에타노는 아마포라의 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불쾌한 시선을 참고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비웃음이 그 대답이었다.


「역시나 그렇군. 얘 딸린 시점에서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저 꼬맹이 자기 얘가 아니라고 했지만 정말인지 아닌지」

「……그럼, 어떻게 이혼할 셈이죠?」

「좋은 걸 하나 알려주지. 사형당하면 남자도 여자도 자유로이 재혼할 수 있거든. ――그 목소리, 잘 아껴두는게 몸을 생각해서라도 낫지 않겠어?」


즉, 노래하지 못하게 된다면 죽인다는 말인가.

아마포라의 순결을 의심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그럴 셈이었다는 거겠지. 독사가 어느새 목에 타고 오르는 것 같은 공포심에 모골이 송연하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하게끔 참고서, 당당히 앞을 바라보며 걷는다.


「실례합니다만, 저는 『하얀색』입니다. 의심되신다면 수녀를 불러서 조사하셔도 됩니다」

「흐응? 뭐 그런 걸로 해두지.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지?」

「거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래?」


가에타노는 수상하다는 듯 곁 눈길로 아마포라의 표정을 보며 걷는다. 신경쓰지 않는 척 하면서, 아마포라는 작게 끄덕인다.


「바라는 대로 《칸타토리스》가 된다면, 전하께서 주시는 저택도 연봉도 마음대로 하세요. 그 대신, 우리들에게 절대 참견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테네렛사 부부나 엘렌은 물론, 리사도. 약속해 주신다면 저는 최선을 다해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병 같은 건 어쩔 수 없기에. 그 때 이혼하고 싶으시다면 하얀 결혼을 주장하시는 편이 서로가 편하겠지요? 저는 안 죽어도 되고, 당신은 두 번째 부인의 죽음.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위험도 없어지니, 합법적인 수단을 취하는 편이 좋겠죠」


그의 목적은 아마포라 자신이 아니라, 이 목소리에 따라올 명예와 재산이다. 그것이 충족된다는 약속만 하면, 신변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정도의 조건은 응하지 않을까. 뭐니 해도 그는 필요 없어진 순간을 미리 염두에 두고서 부인을 내버려 두었으니까.

만만하게 보이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무표정한 가면을 쓴다. 부디 조건에 응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가에타노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불안하다. 꼭 쥔 주먹이 떨리기 시작한 순간, 그가 작게 웃었다.


「좋아. 여자는 창부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몸을 지키고 싶다면 내가 언제든 여자를 살 수 있도록 돈을 벌어」

「……그럼, 거래 성립이지요?」

「물론. 바보 같은 여자는 다루기 쉬워 좋지만, 영리한 여자도 나쁘진 않군. 잘 부탁하지 파트너」


가에타노는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아마포라는 힐끔 바라보더니 휙 시선을 앞으로 돌려 무시한다.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겠다는 계약을 지금 막 했다. 그는 허공을 맴도는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는 짧게 한 숨 쉬며 몸을 움츠렸다.

이걸로 됐다. 엘렌을, 그리고 상냥하게 대해준 테네렛사 부부나 리사를 지킬 수 있다면 자유를 잃는 건 값싼 것이다.

애초에 고가 미술품처럼 거래될 몸이었다. 그와 비슷한 입장으로 돌아갔을 뿐. 몸도 마음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체 조용히 늙어갈 수 있다면 달리 아무것도 바랄 바가 없다.

성 안을 나누는 문을 지난 다음엔 정원과 예배당 구역이었다. 정원엔 과일나무가 있고, 무성히 우거진 가지에 잘 영근 사과가 향긋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그 정원 가운데 석회석 벽면에 조각이 새겨진 예배당이 홀연히 세워져 있었다. 문은 닫겨 있었지만, 어디서 창문이 열려 있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국왕 전하께서는 지금 아침 예배 중이십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길」


전《칸타토리스》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살며시 문을 열고서 살그머니 안에 들어갔다.

리사의 손을 잡고 뒤를 따라온 엘렌은 한 손으로 질끈 《수면에 비치는 달》을 쥐고 있다. 아마포라와 테오발트를 잇는 그것을 지키려는 것처럼.

엘렌이 가장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이 안에 담겨있다. 그러니 결코 놓지 않는다. 엘렌을 위해서도, 그리고 아마포라 자신을 위해서도.

잠시 뒤, 노랫소리가 그쳤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좀 전의 여성이 얼굴을 내민다.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길. 동행분도 함께」


역시나 무뚝뚝한 표정으로 모두를 안내한다. 반원형 문을 지나 안에 들어서자 육중한 외관과는 상이하게 휘황찬란한 공간이 펼쳐졌다.

구멍이 난 반구형 천장 곳곳이 무언가로 빛나고 있다. 잘 바라보니 그것은 수정 조각이었다. 불규칙적으로 천장에 박아 반짝이는 모습이 별하늘을 연상시켰다.

좌우 벽 천장 부근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창문이 늘어서있고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온다. 하지만, 방안을 가장 잘 비추는 것은 정면 재단 위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이다. 달을 본뜬 것일 것이다. 나란히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달의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대가 지원자인가?」


기도문을 둔 재단 앞에 서 있던 남성이 아마포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새파란 옷을 두른 노인. 머리카락도 수염도 하얀색이라, 세르지오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다. 하지만, 쭉 뻗은 등과 활기찬 목소리는 젊음을 느끼게 한다.

두말할 것 없이 모두가 깨달았다. 이 노인이야 말로 라트레이아의 왕이라고.

아마포라는 옷자락을 잡고 들어 올리며 크게 허리를 낮추어 인사했다.

예배당 앞의 긴 의자에는 왕의 피를 잇는 자들이 앉아있다. 예배당에 있는 악보를 든 세 사람의 여성은 현역 《칸타토리스》일 것이다. 모두들 아마포라에게 호의를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성문을 통해 온 지원자는 오랜만이잖아」

「그래, 참 기대되. 하지만 저 분은 누구실까. 그녀의 시종? 너무 화려한 거 아니야?」


긴 의자 끝에 앉은 자매로 보이는 소녀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서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모른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아마포라는 안 들리는 척 하고서 조용히 왕과 대면한다.


「그럼, 어서 노랫소리를 들려주게. 이름은 그 이후에 듣지. 그대의 명예를 위해서」


불합격일 경우엔 분명, 이름을 말할 수도 없다. 지원자에게 수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아마포라는 한 번 더 인사하고서 물어본다.


「어떤 노래를 원하십니까」

「즉흥시를. 마음껏 노래하게」

「즉흥시 말입니까?」


짐짓 찬송가를 요청할 줄 알았던 아마포라는 실례되지만 다시 되묻고 말았다. 하지만 라트레이아 국왕은 느긋하게 끄덕이고 부드럽게 말한다.


「이왕 고용한다면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네. 암송만 한다면 마음이 담기지 않더라도 노래할 수 는 있지. 능숙한 달인이라도 마음이 담기지 않고서야 찬송가는 될 수 없어. 어떤 노래라도 상관없으니 그대의 마음을 노래하게」


못할 것도 없다. 친정에서 요청만 하면 노래할 수 있도록 즉흥시 노래도 같이 배웠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부를 까다. 이 자리에 어울릴지 어떨 진 의문이지만, 이 마음을 노래한다면, 그것은 단 하나 뿐이다.

가슴에 손을 모은다. 그곳에는 늘 있어야 할 돌이 없다. 그것이 더더욱 이 마음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하늘을 나는 당신

   보이시나요 당신이 생명을 준 꽃이 지금 여기 피어났습니다.

   질 줄도 모르고 지금도 생생히

   마중 오는 날개가 헤매지 않고 곧장 왔으면 하는 마음에



   떠나시던 날의 맹세

   기다리겠다는 제 목소리가 당신의 날개에 닿았을 런지

   달이 뜨기를 밤마다 기다립니다.

   별바다 속 당신의 모습을 보고싶어서



   빛을 부디 여기에 내려주세요

   먼동이 무섭습니다. 달빛을 앗아가 버리기에

   수면에 뜬 달빛에 빛나는 부두가 나를 유혹합니다

   지기 전에 건너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빛을 부디 여기에 내려주세요

   마음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마중오시길 기다릴 수 있도록






노래를 끝마침과 동시에, 모두들 놀란 얼굴로 아마포라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째서일까 생각한 순간, 깨닫는다, 뺨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허둥지둥 손가락으로 훔쳐냈지만, 겸연쩍기까지 한 고요한 분위기를 어떻게 할 수도 없다.

좀 더 밝은, 기쁨에 찬 노래를 하는 편이 이 자리엔 어울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미련에 가득 찬 이런 노래를 불쾌하다고 질타할 지도 모른다. 마음을 굳게 먹은 아마포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작은 박수가 들려온다. 작고 발랄한 손으로 박수치는 소리.

시선을 올려보니 긴 의자 가장 앞줄에 앉았던 열 살 전후의 소년이 일어서서 박수치고 있었다.


「슬픔의 노래입니까, 저는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조부님은 어떠십니까?」


소년이 의견을 물어보는 사람은 라트레이아의 왕이다. 하지만 왕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소년의 발언을 시작으로 다른 청중들이 박수로 찬성했다. 그들의 시선은 아마포라에게서 왕으로, 결단을 재촉하는 것처럼 바라본다.

왕은 조용히 아마포라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연다.


「……고개를 들라. 그대의 이름은?」


이름을 요구했다. 그것은 즉, 노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주변에 작은 탄성이 터진다.

얼굴을 들고 어깨를 곧바로 세운 아마포라는 이름을 말했다.


「아마포라 테네렛사라고 합니다」

「아마포라인가……. 과연」


노래에 스며든 의미를 곱씹는 것처럼 왕이 중얼거리며, 시선을 아마포라 뒤에 있는 가에타노를 향했다.


「그들은 시종인가?」

「아뇨, 그들은……」


대답하려던 순간, 발소리를 크게 내며 가에타노가 다가와 억지로 어깨를 안았다. 소름이 쫙 끼쳤다. 자신도 모르게 뿌리치고 싶었지만, 주먹을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찔러 견뎌낸다.


「제 약혼자입니다, 전하」


가에타노의 말에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왕가의 자매들이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쉰다. 다른 왕족들도 인사도 업이 튀어나온 그의 태도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것은 왕도 마찬가지였지만, 눈초리를 세우지도 않고 이번엔 그에게 묻는다.


「이름은 무엇이지?」

「가에타노 파시엔테입니다」

「파시엔테……. 아네로 영주의 자식인가. ――그렇다면 그쪽 아가씨는?」


왕의 시선에 이번엔 선 자세로 꼼작도 하지 못하게 된 리사는 서툰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팔에 짐을 안고서, 다른 한손으론 엘렌과 손을 잡고 있었기에 몹시 잘못된 인사였다. 주변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와 리사는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렌은 왜 주변 사람들이 웃는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저 사람은 시녀입니다. 어린 쪽은 제 약혼자가 주워 기르는 고아입니다. 안사람이 자선에 열심히거든요. 그렇지, 아마포라?」

「……네」


가에타노는 아마포라가 《칸타토리스》에 얼마나 걸맞는지 필사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고용하겠노라는 말이 아직 안 나왔기에 불안한 것이다. 이 문답으로 합격이 백지화 되면 안 된다는 마음에 나서게 된 것이다.

본심으론 엘렌은 자신의 딸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피가 이어지지 않은 건 사실이거니와, 말했다간 하얀 결혼을 주장해야만 하는 사태가 찾아왔을 때 불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음을 깔아뭉개는 각오로 아마포라는 작게 끄덕였다.

어깨너머로 살며시 엘렌을 돌아본다. 엘렌은 리사와 손을 잡은 체로, 다른 한손엔 《수면에 비치는 달》을 잡고있다. 동그란 개암나무빛깔 눈동자는 아마포라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엘렌이 믿어준다. 둘이서 살아서 테오발트를 기다리기 위해, 지금은 어떤 거짓말이라도 해야만 한다.

어깨를 안은 가에타노의 손에 힘이 담겼다. 손톱이 파고든다. 딴청 피우지 말라고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마포라는 허둥지둥 앞을 본다.

왕과 다시 시선이 마주친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부드러운 태도와는 조금 달랐다. 엄하고 무언가를 탐지하는 듯 한 눈빛이었다. 한창 질문하는 도중에 뒤를 신경쓴 것이 잘못이었을까.

그것이 원인으로 쫒겨났다간 가에타노가 분노에 미치고 말 것이다. 못 쓰게 된 여자는 필요 없다고 엘렌과 리사를 함께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아마포라는 무례를 사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앞 왕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약혼자라고 했나, 그것은 정말 쌍방의 의사로 인한 것인가?」

「물론입니다」


가에타노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느닷없이 정곡을 찔렸기에 놀란 것이다. 아마포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마포라, 그대는 어떻지?」


왕이 바라보자 생각했다. 이것은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상대는 라트레이아의 왕이다. 도움을 요청하면 아마포라는 물론 엘렌과 리사도 보호해 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주저하고 말았다.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들은 살지 몰라도 세르지오나 데보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가에타노가 장원의 지배인인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왕도 그 지위는 박탈할 수 없다. 그는 한번 정해진 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협박당해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 들, 증거가 없다. 아마포라가 마음을 바꿨다고 주장한다면 피해자는 가에타노가 되며, 엘렌의 목에 남은 자국을 보인다 해도 마땅한 벌을 준 것이라고 할 것이다. 전 처의 죽음에 관해서도 그 지경으로 내몬 것은 이 남자지만 직접 손을 쓴 것도 아니고 자살이다. 그를 내쫒는다 해도 장원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는 동안엔 섣불리 행동할 수 없다.

생각에 빠져 침묵한 아마포라에게 초조해진 가에타노의 손톱이 또다시 어깨에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한다.


「서로 합의한 결과입니다. 그렇지, 아마포라?」

「……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행동, 말 하나하나에 사람 목숨이 달렸다고 생각하면 달리 어찌할 수도 없었기에.

왕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이윽고 작게 한숨을 쉰다.


「그런가……. 그럼 전달하지. ――아마포라, 그대는《칸타토리스》다」

「영광이옵니다!」


대답한 건 가에타노였다. 아마포라의 어깨에서 손을 때고, 기쁜 표정으로 왕에게 인사한다. 그 모습을 힐끔 보며 왕은 아마포라에게 시선을 되돌린다.


「저택은 금방 수배하지. 그때까지 성 안에 있는 탑의 방을 준비 할테니 거기서 참아주지 않겠는가?」

「네. 엘렌과 리사――뒷쪽의 아가씨들도 함께한다면 어디라도 문제없습니다」


아마포라의 대답을 듣고 왕은 기쁨에 어쩔 줄 모르는 가에타노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파시엔테 경」

「네, 전하」


이름을 불린 가에타노는 기쁨에 인사하며 대답한다. 그런 그에게 왕은 무뚝뚝하게 알렸다.


「그대는 아네로로 돌아가도록」


예측과 다른 말에 가에타노는 아연해져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그게 무슨……?」

「내가 고용한 건 아마포라다. 뒤에 있는 아이는 그녀가 양육하고 있기에 딸로 취급한다. 시녀도 필요하겠지. 고로 두 사람은 아마포라와 함께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대는 약혼자지? 아직 부부는 아니야, 그러니 타인이며 상관없는 사람이다. 상관없는 사람까지 둘 수는 없다. 꼭 코르느에 머물고 싶다면, 거리에 나가 숙소를 찾도록 해라」

「하지만……!」

「정식으로 혼인한 남녀가 아닌 한, 동거는 용납할 수 없다. 그리고 《칸타토리스》는 라트레이아, 나아가서는 내 것이다. 《칸타토리스》를 아내로 하려면 내 허가장이 필요하다. 그것도 후일 준비하도록 하지.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예」


대답할 말이 없어진 나머지 가에타노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곁에 있던 아마포라는 그의 벽안이 불만으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모두들, 새로운 《칸타토리스》에게 축복을」


왕의 말에 제단에 있었던 《칸타토리스》들이 찬송가를 불렀다. 그에 맞추어 왕가의 사람들이 기도를 올렸다. 아마포라도 리사도 기도하며, 엘렌도 흉내낸다.

그런 와중에, 역시 가에타노 만이 고개를 숙인 체로, 단 한 번도 기도를 입에 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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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포라에겐 다행이지만, 저 남자가 이대로 물러날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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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환생 - 3

2012/05/06 22:41 | Posted by 샤니체리



【칠십팔일째】


평소처럼 비오는 날. 결코 멎을 날이 없는 비.

나는 오늘도 폐품을 나른다.

폐품을 나르는『위』너머에 펼쳐진 해안선 일대는 처음에 비해 자갈더미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것은 이 해체공사의 종료 시기가 가깝다는 뜻이다.

예의 딸랑거리는 금속소리는 예전에 본 적이 있었던 댄스처럼 불규칙적으로 내 머리속을 무대로 삼아 스탭을 밟고 있다.

차라리 머리를 열어 꺼낼까도 생각해 보았던 적도 있지만, 이렇게 두툼한 팔로는 세세한 작업을 하기엔 불안하다. 열기는 했지만 못 닫게 되면 싫으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단순 노동을 계속하던 나는 이 날 점심 무렵 드문 모습을 목격했다.

현장 감독이 사과하는 장면이다.

감시대 위에서 평소엔 콧대를 치켜세우던 현장 감독이 굽신 굽신 인사하며 억지 웃음을 짓고 있다. 자세히 바라보니 감독 옆에는 커다란 떡대 중년 남성이 뭐라 지시를 내리고 있다.

――높으신 분일까. 어쩌면 여기 사장님일까.

나는 폐품을 나르며 힐끗 바라본다. 그 남성은 감시대 위에서 우리들을 몇 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때마다 현장 감독은 서둘러 메모한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시선을 정면으로 되돌리자 볼포크의 커다란 등이 보인다. 바로 옆에는 리리스가 있다.

나는 캐터필러를 재촉한다. 따라잡으면 물어보자.

머릿속으로 금속을 쩔렁거리며, 나는 빗 속을 나아간다.





「좀 이상하지 않아?」


리리스가 입을 열었다.

심야 두시, 평소처럼 창고, 낡은 목제 둥근 테이블. 독서회를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뭐가 이상한가요?」

「저기, 아이리스도 봤잖아? 그 거한」


폐품속에서 주워온 것일까. 소형 테이프 레코드를 만지작거리며 리리스가 나를 본다. 정갈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지금은 불만으로 눈썹을 치켜뜨고있다.


「아, 감독과 이야기하던 키가 큰 사람 말인가요?」

「그래그래. 그 사람 말인데 예전에 왔었던 『본사』쪽 사람이지?」

「본사……? 어디 본사 말인가요?」

「여기 회사의 본사 말이야. 감시원 제복에 빨간 로고 마크가 있잖아. ……뭐라고 쓰여 있는진 못 읽지만」

「빨간 로고 마크……」


나는 색깔을 구별할 수 없기에 확 와닿지 않는다.


「타고 왔던 자동차에도 똑같이 마크가 있었으니, 분명 오벌시에 있는 본사에서 온거야」


나는 『오벌』이란 말에 가슴이 철렁한다. 그곳은 나와 박사님이 살던 마을이었다.


「오벌……여기서 가까운가요?」

「어? 오벌시 말이야?」


내가 끄덕이자 리리스는 「바로 옆이야. 자동차로 오십분도 안 걸리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오십분……」


그 대답에 나는 숨을 삼킨다. 자동차라면 겨우 오십분. 이 현장에 오고 나서부턴 이곳이 마치 아주 먼 이국의 땅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 나에게 있어서 그 거리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그런데 말이지」리리스가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린다. 「오늘 말이야, 이상한 이야길 들었어. 본사의 높으신 분이 돌아간 다음, 현장 감독끼리 대화하던데」

그 순간 리리스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애초에 그러지 않아도 창고 안에는 전류가 안 흐르는 로봇뿐이지만.


「이 공사가 끝나면 이놈들도 쓰레기통행인가, 라던데」

「……? 무슨 의미지요?」

「그―러―니―까, 쓰레기통말이야, 쓰레기통! 지금 해체공사가 끝나면 우리들은 고철행이란 뜻이야!」

「으……!」


나는 절로 신음한다. 고철이란 말을 듣고 『그 날』의 일을 떠올린다. 사지가 잘려나간 바로 그날.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넌 어떻게 생각해?」


리리스가 왠일인지 볼포크의 의견을 물어보자, 그는 바로 대답했다.


「로봇, 인간을, 따른다」


「나 참……」리리스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포크의 팔을 두드린다. 「생각 제대로 하고 하는 말이야? 이대로는 고철행이라고」

「로봇, 인간을, 따른다」볼포크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좋아,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리리스는 뒤에 있는 잡동사니에 몸을 기댄다.


「난 절대로 사양이야」


「하지만」나는 리리스를 본다. 「우리들은 별 수가 없잖아요」


「도망치면 되잖아」

「하지만 강제명령 코드가 있잖아요」

「그건 괜찮아. 왜냐면 난 진즉에 해제했으니까」

「……네?」


나는 놀랐다. 로봇에게는 안전회로(세이프티 서킷)이 있고, 강제명령 코드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인간에게는 결코 거역할 수 없는 해체금지 프로그램.


「나 말이지, 안전회로가 부서졌어. 네 번째 전의 현장에서였을까? 무거운 기계에 깔려버려서 말이야.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충전 못 받으니까, 이렇게 계속 사람을 따르는 시늉을 해왔어」

「거짓말……그러면 볼포크도 그래요?」


나는 그를 본다. 그는 평소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볼포크, 안전회로, 그대로」

「이 사람은 군사용이니까」


리리스가 볼포크를 보며 말한다.


「안전회로(세이프티 서킷)이 보통이 아니야. 예전에 이 사람의 안전회로를 빼보려 했지만, 내 실력으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어. ……도중까진 잘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새카만 장치가 방해가 돼서……」


볼포크는 가슴을 펴고 「볼포크, 안전」이라고 말했다. 리리스는 「그래그래, 참 안전하시네요」라고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한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렇게 느긋하게 굴 상황이 아니야」


리리스는 볼포크를 지그시 바라본다.


「너, 정말로 고철덩이가 되어도 좋아?」

「로봇, 인간을, 따른다」

「후우……」


리리스는 한숨 쉰다. 그 얼굴은 정말로 곤란해 보였다. 평소엔 그렇게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그녀는 볼포크를 꽤나 신경 쓴다.


「……뭐 됐어. 그보다 아이리스, 네 안전회로는 곧 해제할 테니까. 여차하면 『긴급 정지 버튼』을 눌려도 도망칠 수 있도록 말이야」


긴급 정지 버튼은 현장의 로봇을 일제히 정지시키는 비상용 버튼을 말한다. 현장 감독이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을 나도 본 적이 있다.


「해제? 그렇게 할 수 있나요?」

「할 수 있어. 난 예전 현장에선 동료들의 응급수리도 했으니까. ……훔쳐배운 거지만」


리리스는 테이블 아래에서 공구함을 꺼냈다. 물론, 현장에서 얻은『전리품』이다.


「움직이지마. 특히 정신회로(마인드 서킷)은 섬세하니까」그녀는 내 뒤로 돌아서서, 드라이버를 댄다.


「저, 정말 괜찮나요?」

「괜찮아괜찮아! ……아마도」


곧바로 정수리 부근을 끼릭거리더니, 리리스는 내 머리의 나사를 풀기 시작한다. 테이블 위 플라스틱 케이스에 하나, 또하나 작은 나사가 늘어난다.

이윽고,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두부가 열렸다.


「흐음, 제삼공장 처분품인가, ……과연」


리리스는 응응하며 혼자서 납득하고 있다.


「뭔가 알아내셨나요?」

「네가 이 현장에 온 루트를 알아냈어. 평소처럼 그 고철상 쪽이네」

「고철상?」

「있잖아, 로봇은 신품을 사면 비싸잖아? 그러니까 손과 다리의 중고 부품을 짜 맞추어 『자작』으로 만드는 고철상이 많아」


나도 그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중고품을 모아서 위법개조 로봇으로 만든다는 이야기――예를 들자면 나같은.


「분명 넌 현장 감독이 오벌 시내의 고철상한테서 싸게 사 온 거야. 원래는 로봇 관리국이 사들였지 않았을까?」


아마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고철이 되고 나서 현장에 도달한 경위를 설명 할 수 있다.


「거짓말……」그 순간 리리스는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세요?」

「대단해, 이런 소형 정신회로(마인드 서킷), 처음 봤어……!」


리리스는 내 안을 보고 탄성을 연발했다. 「대단해, 안전회로(세이프티 서킷)도 이렇게나 작다니! 그것도 오리지날이라니 이럴수가!?」라고 흥분한 모양이다. 나는 어쩐지 부끄럽다.

리리스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옆에서 내 머리를 들여 본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어깨 위에 늘어뜨려진다.


「너, 정체가 뭐야?」


「……예?」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몸 파츠는 구형인데, 정신회로는 엄청난 하이스팩이잖아. 이게 어떻게 됀거야?」


내 마음 속에 그림자가 진다. 떠올리기도 싫은 과거. 마음 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서글픈 기억.


「아, 뭐야 이건?」그 순간 리리스는 또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무슨 일인가요?」

「정신회로 부분에 뭔가 사슬 같은게 걸려 있잖아?」

「사슬?」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요즘 머릿속을 쩔그렁거리는 『그 소리』를 말하는 것이다.


「잠깐만 있어봐……」


리리스는 공구함에서 바늘을 꺼내어 꾹 굽혀 갈고리를 만들었다. 낚싯바늘 같은 모양이다.


「지금 뺄게」


조금 지나서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좋았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바늘은 먹잇감을 꿰어 낸 모양이다.


「이건 뭐야……팬던트?」바늘을 집어든 리리스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에?」


내가 돌아보자, 리리스는 「자」하고 꺼낸 것을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것은 팬던트처럼 사슬이 달렸고, 잿빛에 타원형이었다.

아니, 잿빛이 아니다, 원래는 은색으로 반짝이는――.

담배케이스.


「아……」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내밀어 그 담배 케이스를 잡는다.

검은 기름으로 더럽혀진 케이스에는 말라붙은 혈흔이 생생하게 여전히 남아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케이스를 열자, 낯익은 8자형 담배가 테이블 위로 굴러가더니, 운전수를 잃어버린 자동차처럼 조용히 털썩 넘어졌다.


「아아……」


그리고 케이스 뚜껑에는 『그 사진』이 박혀 있었다.

영화 간판을 등지고 밀짚모자를 쓴, 프릴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소녀. 그 옆에는 껑충한 키에, 와이셔츠가 참 잘 어울리고,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박사……님……」


케이스를 든 내 오른팔이 덜덜 떨려온다. 그 떨림은 금새 온 몸으로 퍼진다. 줄곧 참고 있던 마음이, 참을 수 없게 된 아픔이, 사랑한다는 마음이, 깊은 절망이,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옥을 부수고 내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사신 속의 박사님은 내게 가슴을 내밀고, 과거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려 준다. 「나 왔어, 아이리스. 오늘도 얌전히 있었니?」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그래도 조금 난폭하게 어루만지던 박사님. 「응, 역시 맛있네. 아이리스는 정말로 요리 능숙해」칭찬해 주던 박사님. 「어라 아이리스씨,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심술 굳던 박사님. 「저기, 아이리스군?」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는 박사님. 「잘 자렴, 아이리스」상냥한 박사님. 그래도 돌아가신 박사님. 이젠 두 번다시 만나지 못할 박사님, 박사님, 박사님, 아아, 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박사님.


「으, 아……으아아아아아아――!!」


나는 통곡한다. 테이블에 엎드려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목 놓아 울면서, 절규한다. 즐거웠던 추억도, 상냥했던 기억도, 모두가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 안의 부드러운 부분을 차례 차례로 깊숙이 찌른다. 감정이 복받쳐 올라 파도가 되어 나를 깊은 곳에 빠뜨린다.

「아이리스!」그 순간, 리리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내 뒤로 들려왔다. 그리고 계속 경련하는 나를 두 팔로 꼭 안았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 아아――」


나는 리리스의 팔을 잡고, 그저, 버텼다. 고통과 슬픔의 바다를 허우적대면서 필사적으로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리스……」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리리스는 계속 나를 다독였다. 등을 통해 전해오는 그녀의 몸은 무척 부드럽고, 따스해서, 과거 박사님이 이렇게 나를 안아 주었던 그 때를 떠올리게 한다.

조금씩,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었다.





시간이 지났다.

내 경련은 거의 다 멎고, 손가락이 조금 흔들릴 뿐이었다.

리리스는 가만히 걱정스래 내 손을 잡는다. 볼포크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본다.


「……진정됐어?」


리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본다. 나는 「네……」라고 힘없이 대답한다.

그로부터 그녀는 담배 케이스와 나를 바라보며 주저하면서 「이건……너야?」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본다.

리리스의 커다란 눈동자가, 무척 걱정된다는 듯 내 모습을 비추고 있다.

볼포크의 사각형 눈이, 따스한 빛으로 내 말을 기다린다.

――그래, 이 두 사람에게는.

내 진실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에겐 말해도 좋다――오히려 알아 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나는, 봇물이 터져 나오듯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고명한 엄브렐러 박사님이 만드셨다는 것. 박사님이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 너무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 하지만 죽지 못했다는 것. 로봇 관리국 직원이 찾아왔다는 것. 그리고 고철이 되어 정신이 들고 보니 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

오른손 손가락으로 「이쪽이 박사님이고……이쪽이 나」라고 사진을 가리킨 순간은, 리리스는 숨을 삼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포크도 조금이지만 몸을 들썩였다.

겨우 십분 정도였을까, 내가 이야기를 끝마치자 창고는 다시 고요해졌다.

테이블의 담배 케이스에는 여전히 나와 박사님이 웃고 있었다. 박사님은 장난스럽게, 나는 조금 경직된 얼굴로.

「그래……」리리스는 케이스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다 싶었어. 아이리스는 여자 같은 이름이니까……」

그리고 나서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실은, 나 말이야」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옛날엔, 인간의 집에 있었어」





그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말해주었다.

리리스는 오년 정도 전, 『선라이트 가』라는 명가의 특별 주문한 로봇으로서 사들여졌다. 선라이트 가는 아이가 없었기에, 그 대신 아이형 로봇을 기르고 싶다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고생을 모르고 살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리리스는 행복했다고 한다. 옷을 사거나 같이 놀거나, 마치 진짜 딸처럼 사랑해 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니게 된 것도, 그만큼 부모님이 돈을 썼다는 증거였다.

상황이 바뀐 것은 이 집에 와서 이년 후였다. 부모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다. 리리스는 처음엔 자신의 여동생이 생겼다고 기뻐 마지않았으나, 상황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리리스를 버렸다.

그것은 맥이 빠질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어느 날 아무런 전조 없이 로봇 회수업자가 찾아와서 그녀를 납치하듯 데리고 가버렸다. 부모님은 마중도 안 나왔다.

그로부터 그녀는 『중고품』으로 다시 판매되었다. 처음에는 찻집이나 접객소에서 일했고, 그 후에는 건설 회사를 전전하다가 지금 현장에 도착했다. 겉보기엔 화려했지만, 힘이나 적재중량이 컸기에 지금껏 어떻게든 해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무척 슬픈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 일인 것 같은 말투로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볼포크 이외에 이 사실을 말한 건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야」


이야기를 끝마치자, 리리스는 볼포크를 바라보며, 「아이리스에게 이야기해도 돼?」라고 물어보았다. 볼포크는 담담히 끄덕인다.


「볼포크의 풀네임 기억해?」

「볼포크 가롯슈, 지요」


리리스는 끄덕인다. 그리고 「정확히는 볼포크 가롯슈 우로보로스란 이름이야」라고 말을 이었다.


「우로보로스?」

「그래, 우로보로스. 원래는 신화에 나오는 뱀의 이름이란 모양이지만. ……그래서 말이야, 볼포크는 군에 있었을 무렵, 우로보로스란 이름의 부대에 있었어」


나는 불현듯 「볼포크, 죽이는 방법, 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 우로보로스란 부대는 로봇뿐인, 기갑―……으음, 뭐였더라?」


리리스가 볼포크를 바라보자, 그는 짧게 「기갑병단」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그 기갑병단에 있었고 여기저기 전장에 파견됐어. 그런데 스물 여덟번째 전장에서 갑자기 귀국 명령이 나왔어」

「어째서죠?」

「최신형 로봇 병기가 개발되어서야. 그러니 그걸 투입하는 대신, 볼포크네 부대 『구식』은 필요 없어졌어」


그러고 보니 예전이 보았던 뉴스에서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군용 로봇이 왜 공사 현장에 있나요?」

「일단 여기도 군 관계 회사라나봐. 그렇다곤 해도 하청 중에서도 하청이니까, 상당한 블랙회사 같지만. ……거기다 말이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군 로봇 관리란 건 참 엉성하거든」

「엉성?」

「볼포크 외에도 꽤 많이 나돌아 다니니까, 원래 군용 로봇인데. 전선이 줄어들어 쫓겨나거나, 낡아진 기종이 대량으로 유출되거나」

「그런건가요……」

「매정한 일이지. 멋대로 만들어 놓고서 필요 없으면 내친다니까」

리리스는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그런 다음 그녀는 담배케이스를 들고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넌 아직 나은 케이스야」

「나은?」

「왜냐면 이 박사님은, 마지막까지 널 소중히 여겼잖아?」

「하지만 그건……」


박사님이 죽은 지금, 그런 말을 한들――이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리리스는 부모님이 버렸다. 볼포크는 군대에서 버렸다.

나는 박사님이――버리시지 않았다.

「그래, 낫다구, 나아」 리리스는 지그시 사진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마지막까지 사랑해 주었으니까……」

나는 이 순간 드디어 깨달았다. 그 순간 리리스가 어째서, 마법의 반지 프라우 스노를 그렇게 감쌌던 것인지.

새로운 반지가 생기고, 보금자리를 잃은 낡은 반지.

그 반지는, 리리스이며, 볼포크였던 것이다.





【팔십삼일째】


그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시작되었다.

아침, 감시원의 질타에 깨어난다. 창고에서 개미 행렬처럼 기어 나온 우리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단순 작업에 종사한다.

사고가 터진 것은 오후였다. 휴식종료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나와 리리스가 잡담을 그만두었을 무렵.


「아이리스」


갑자기 아이리스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뭔가요?」

「저길 봐」


매서운 눈동자로 그녀는 눈짓했다.

――아…….

리리스의 시선 끝에는 감시대가 있었고, 그곳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예전에 현장 감시 지도를 하고 있었던 『본사의 높으신 분』이다. 그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있다.


「대체 무슨이야길 하는 걸까요?」

「글세……」


남자의 전화가 끝난 직후였다.

현장에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보니 평소 폐품운반용 트럭보다도 한층 커다란 차가 현장의 경사면 바로 앞, 『장』근처에 정지했다. 그 새카만 차체는 기묘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고, 견고한 몸체는 경찰 장갑차를 연상캐한다.


「작업중지!」


현장 감독의 호통소리가 들리자 백여대의 로봇들이 일제히 멈췄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놈은 『장』앞에 긴급 집합이다! 이번, 육번, 칠번, 구번……」


현장감독은 마치 합격발표처럼 차례차례로 번호를 소리치기 시작한다.


「십삼번, 십육번, 십칠번……」


십오번인 볼포크의 번호는 넘어간다.


「뭐가 시작된 건가요……?」


내가 리리스를 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리리스의 『삼십 팔번』도 넘어갔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이 갑작스런 합격 발표를 지켜본다. 「구십 육번, 백 이번, 백 오번, 백십일번……」그렇게 내 번호 『백팔번』도 넘어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백십오번, 백십팔번. ……이상이다! 불린 놈들은 바로 집합해라! 우물쭈물대지마!」


번호를 불린 로봇은 전부 합해서 사십한대. 이 현장에 있는 로봇의 3할에 해당한다.

오 분이 지나자 조금 전 대형 차 앞에 사십 한 대가 나열했다. 마치 인기 상품을 사러 줄을 선손님처럼.


「좋아, 시작해라!」


현장 감독이 소리치자 검은 대형 차량은 천천히 적재함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문이 올라가자 안쪽에는 쿵쿵 거리며 회전하는 거대한 『롤러』가 나타났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쓰레기 수집차량을 떠올렸다. 단지, 지금 움직이는 차는 그 몇 배는 된다.

처음에 이번이 불렸다. 사족보행 로봇이지만, 달리는 말처럼 리듬 있게 몸을 위아래로 흔들며 감독 앞에 나아간다.


「이 안에 들어가라」


현장감독이 그렇게 말하며 검지로 뒤에 있는 자동차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우르릉 거리며 회전하는 금속 입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은 한순간 무슨 일인지 몰랐던 듯, 가만히 감독을 올려다본다.


「어서 들어가라! 이건 명령이다!」


그 호통소리에 꿈틀 2번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경직된다. 그리고 이번의 네 다리는 휘청대며 한걸음, 또 한걸음 롤러에 다가갔다.


「……거짓말」


내가 멍하게 말한 순간, 이번은 회전하는 롤러 안에 첫걸음을 내밀었다.

그 순간.

끼릭, 하고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번의 『앞다리』가 롤러의 날에 끼여 일그러졌다. 곧이어 앞다리가 부서지고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그는 프레스 공정당한 금속품처럼, 상반신부터 천천히 짙 눌려진다. 흉폭한 강철 턱이 삐그덕 소리내며 그를 씹어 부순다.

돌연간 시작된 대낮의 처형극을 우리들은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도 꼼짝도 하지 못한다.

이윽고 2번의 몸이 상반신이 롤러가 집어 삼켜 보이지 않게 되자, 물구나무서기 하듯 뒷다리가 올라갔다. 그 뒷다리도 삐끄덕 자갈 씹는 소리를 내며 압축당해, 나사와 볼트를 주변에 몇 개 흩뿌리며 사정 봐주지 않는 검은 악마에게 삼켜졌다. 처음 한걸음을 내밀고 나서 2번의 몸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겨우 십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2번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요 삼개월동안 언제나 시야에 들어왔었고, 백대 이상 있는 동료 가운데에서 『그』가 인식번호 이번이라는 걸 알 정도로는 나는 그를 알고 있었다. 사족보행이고, 구형 양산기, HRP006형.

바로 그가 이젠 흔적도 남지 않았다. 물론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다. 이 황량한 공포의 여운에 내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다음 육번!」


현장 감독이 소리치자 육번의 몸이 꿈틀 떨었다.

나는 그도 안다. 그도 마찬가지 캐터필러 형이고, 두부가 없는 대신 가슴 부근에 망원 렌즈 같은 시각장치가 붙어있는, 꽤나 구형 노동용 로봇이다. 접점이라면 그가 그만 진창에 빠져서 부딪힌 적이 한번 있는 것이 전부. 그 때 「미안해요!」라고 반사적으로 사과하던 그의 목소리는 나와 쏙 닮은 전자 음성이었다.

그와 접점은 그것뿐이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인 관계일지라도.


「들어가라! 이건 명령이다!」


육번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공물을 바치듯 앞으로 내민다. 손가락 끝이 롤러에 닿자 마자, 팔이 단숨에 빨려 들어가고 삐끄덕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납작해진다. 그의 팔이 어깨죽지까지 눌리자, 좀 전의 이번과 마찬가지로 그 몸이 부서진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앞으로 뱅글 도는 자세로 하반신의 캐터필러가 차 안으로 삼켜졌다. 때때로 팅팅 과일 씨라도 뱉는 것처럼 작은 부품이 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불과 오초 만에 육번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 칠번!」


처형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낡아서 작업 효율이 나빠진 로봇의 고철더미란 점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족보행 이번도, 캐터필러 육번도, 지금 불린 칠번도, 최근 계속 상태가 나빴다. 동작이 늦거나 폐품을 떨어뜨리거나 해서 감독에게 종일 호통을 받았다.


「다음, 구번!」


검은 악마는 우르릉대며 로봇들을 집어 삼킨다. 손 다리 몸 전부 용서 없이 씹어 부수고, 때때로 입에 안 맞는 찌꺼기를 팅팅 거칠게 뱉어낸다. 차 아래쪽은 이미 그런 잔해로 가득했다.

처참한 처형은 담담히 이어지고, 드디어 마지막 한 대가 남았다.


「왜 그러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로봇 『백십팔번』은 차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보다 늦게 현장에 온 이족보행 그는 몹시 행동이 굼떴고, 콩나물 같은 가느다란 사지를 흔들거리며 현장을 환자처럼 걸어 다녔다. 다른 로봇과 어깨가 닿을 때마다 넘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명백히 정비 불량으로 인한 것이었다.


「어이 백십팔번! 왜 그러나! 이건 명령이다!」


현장 감독의 짜증난다는 목소리에 백십팔번의 몸이 움찔 떤다.

그리고 그는 부들부들 작게 경련하면서, 고뇌하는 듯 긴 팔로 머리를 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이, 뭐하나! 일어나 백십팔번! 이건 명……」


그 순간이었다.

백십팔번은 고무공처럼 튕겨 올라, 눈길하나 주지 않고 달아났다.


「뭐……!」


현장 감독이 넋을 잃었다.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친 로봇은 내가 아는 한 처음이다. 안전회로(세이프티 서킷)에 지장이라도 생겼는지, 인간에게 반기를 든 백 십팔번은 휘청거리는 발놀림으로, 하지만 지금껏 그가 보여준 것 중에서 최고의 속도로 멀어져간다. 경사면을 달려 내려가, 자유를 얻으러 도주한다.

하지만 현장 감독은 그를 쫒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로봇에게 붙잡으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백 십팔번은 현장을 둘러싼 철조망을 달그락대며 올라갔기 때문이다.

――아아, 안 돼! 그쪽은!

백 십팔번이 철조망을 오 미터 정도 올라가, 가시철망에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파직 전깃불이 나더니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백 십팔번은 철조망 가장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고압전류가 그의 몸을 습격한 것이다.

지면에 떨어진 그는 「제길, 제길!」하고 욕을 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 몸은 마비된 듯 부들부들 흔들리기만 할 뿐, 안의 회로가 잘려 몸이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이 일목요연했다.

이윽고 움직이지 않게 된 그를 현장 감독의 명령을 받은 로봇 한 대가 구속했다. 그리고 로봇은 그를 폐품처럼 짊어지고 담담히 날랐다. 그것은 이 현장에서 몇 천 번 몇 만 번 반복된 평소 그 광경이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옮겨지는 백십팔번이 「싫어, 싫어, 죽기 싫어!」라고 울부짖었다는 점이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엄브렐러 저택 연구실에서 발작을 일으켜 자살을 기도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치밀어 오르는 압도적인 공포와 초조. 「싫어, 죽기 싫어!」라는 생존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


「저, 저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소리치고 있었다. 백 십팔번을 구하려고 했는지 어땠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울부짖으며 도움을 구하는 그를 보고서 꼼작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하지만.

캐터필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려던 순간이었다. 나를 누군가가 뒤에서 엄청난 힘으로 붙잡아, 난폭하게 넘어뜨렸다.

――어?

올려다보니 리리스가 서 있었다. 눈썹을 치켜뜨고 눈을 크게 뜨고서,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무서운 표정으로 「가만히 있어!」라고 매섭게 소리쳤다. 나는 위를 바라본 체로,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슬픈 얼굴로 「부탁이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백 십팔번은 차 앞까지 날려 온 다음, 이번에야말로 차량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금속제 처형집행인은 그 턱을 벌리고 한 입 한 입, 천천히 맛을 보려는 듯 백 십팔번의 하반신을 부숴갔다. 그 사이에, 귀를 덮고 싶어질 것 같은 단말마의 비명이 현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백십팔번은 죽었다.

사십한대 로봇을 삼킨 악마가 떠나가자, 대량의 찌꺼기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현장 감독은 우리들의 일을 재개시켰다. 재개 후의 첫 작업은 동료의 내장과 육편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담담히 작업에 종사했다. 리리스도 볼포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체로 기름 냄새 찌든 동료의 조각을 주워 모았다.

내가 백 십팔번의 시야 렌즈를 주워 들자,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산산이 부서져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그날 밤, 우리들은 탈주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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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인데도 날씨가 조금씩 더워지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엔 내년엔 에어컨이 함께하기를! 하고 바랬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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